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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벗기며 놀리기 - 연극 strip tease

sungwo 2024. 10. 1. 18:44

자계예술촌의 연극 strip tease 에 대한 해석

오늘 영동문학관에서 연극 한편을 봤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와 관객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그 대화를 듣고 나서 이 연극에 대한 해설을 좀 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연극을 본 사람들, 혹은 앞으로 그 연극을 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요. 

자계예술촌 연극 포스터

연극에 대한 감상 혹은 해석

  모든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습니다. 굳이 작가의 의도를 몰라도 된다는 얘기도 그 중 하나죠. 그냥 독자 혹은 관객이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감상하면 되다는 얘기입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작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무엇이다, 라고 해설하는 게 의미가 없어집니다. 각자 해석하면 그만이니까요. 독자, 혹은 관객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주장입니다. 그런대 이 의견에는 단점도 많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오독을 인정하자는 얘기인데요, 그럴 경우 작품의 진정한 의미나 재미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작품을 통해 생각이 넓어지는게 아니라 늘 자기 수준에서만 감상하고 이해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겠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제가 느낀 것이 바로 이런 점이었습니다. 아무리 해석의 다양성을 허락한다하더라도 너무 멀거나 엉뚱한 해석들이 좀 나왔거든요. 자기 나름의 해석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개연성 정도는 있어야합니다. 그런 점에서 좀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 정도는 아는 것이, 그래도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습관을 좀 들이다보면 부조리극 같은 좀 난해한 연극을 이해하고 감상하기가 점점 좋아질거라 생각해요. 

 

작가, 시대적 배경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작가에 대해, 그리고 작품이 나온 시대적 배경에 대해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아, 이런 성향을 가진 작가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썼으니 작품에서 그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겠구나' 짐작할 수 있겠죠. 먼저 작가를 볼까요. 극작가는 스와보미르 므로체크라는 폴란드의 극작가입니다. 꽤나 유명한 사람이네요. 1930년대에 태어났고 1950-60년대부터 작품 발표를 했고, 이 작품은 1959년에 발표된 것으로 나와 있네요. 당시 폴란드 사회주의 정부와 불화를 했다, 그래서 망명을 해서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살았던 것으로 나옵니다. 이런 정보만 보더라도 대략 짐작할 수 있겠네요. 소비에트 정부, 사회주의, 억압, 스탈린. 이런 단어들이 떠오르겠죠. 당시는 세계가 미소 냉전 구도 속에 있었고 폴란드는 소련 진영에 속해 있었죠. "위성국가"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당시 폴란드는 자유, 민주주의 이런 것과 거리가 먼, 소련의 실질적 지배하에 있었고 자유가 극히 제한된 사회였습니다. 그런 정부에 불화했다는 것, 그리고 이 연극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자유"라는 것을 보면 이제 좀 이 연극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품 해설

  먼저 두 사람은 갑자기, 어떤 큰 외부의 힘에 의해 가던 길에서 사방이 막힌 골방에 내 던져집니다. 자유를 잃고 방에 갇힌게 된거죠. 큰 외부의 힘, 그것은 아마 폴란드나 소련 사회주의 정부를 가르키는 것일 겁니다. 좀 더 확장해서 해석하자면 '외부의 권력' 정도로 할 수 있겠네요. 이들이 외부의 힘에 의해 거기에 갇혔다는 건, 이들의 자유 상실의 원인이 스스로에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들이 이곳에 가둬놓은 외부의 힘은 극이 끝날 때가 계속 나타납니다. 연극에서는 하얀 손의 모습을 하고 있죠. 외부의 힘은 가끔 나타나서 이들의 옷을 하나 둘씩 벗깁니다. 다음에는 수갑을 채우고 극이 마칠 때쯤이면 이들을 어디로 끌고가죠. 

 

  옷을 벗긴다는 건 수치를 의미합니다. 아마 작가는 자유를 박탈 당했을 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을 수치로 꼽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독재를 하면서 경제 성장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실재 많은 국가에서 그런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랬죠. 외부의 힘은 처음 신발을 벗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이들을 압박합니다. 후반부에 이르면 남자 배우가 이런 말을 하죠. 지금까지는 공간만으로만 압박했는데 이제는 시간까지 좁힐 것 같다고요. 그래서 끝부분, 이들이 끌려가는 곳은 부정적인 곳입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희망적인 곳이라 해석하는 것은 맥락에서 많이 어긋나죠. 자유의 공간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중심 인물은 남자와 여자 두 명입니다. 대사 분량도 비슷해서 둘을 대등하게 여길 수도 있겠는데요, 그건 아닌 듯합니다. 남자는 계속 방을 나갈 방법을 찾고 이를 시도합니다. 이에 반해 여자는 그냥 방안에 남아 있겠다고 하고요. 여자가 방에 그대로 남아 있겠다고 할 때부터 극은 긴장감은 높아집니다. 외부의 힘에 의해 갇혔는데, 그대로 있겠다니?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한 건 여자는 그것을 자신의 "자유 의지" 때문이라 말합니다. 나가는 선택을 하고 이를 시도해 버리면 선택 가능성 하나를 잃게 된다는 논리로 말이죠. 그리고 탈출을 시도하는 남자를 오히려 나무랍니다. 당신 때문에 손으로 상징되는 권력이 나타나서 신발을 뺏고, 옷을 벗기고 했다고 말이죠. 

 

  작가의 비판 지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를 상실했는데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바로 "자유"라 변명하거나 왜곡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거죠. 이들은 오히려 저항하는 이들에게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고 비난합니다. 이런 모습, 어디선가 본 적 없나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여자는 외부의 권력, 흰손에게 자기는 저항하지 않았으니 자기는 좀 봐달라고 사정합니다. 기회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수치"를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자유를 잃을 자 모두에게 수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연극을 감상할 때 남자와 여자는 대등하게 놓고 감상하면 오독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자처럼 저항하는게 좋으냐, 여자처럼 가만히 있는게 좋으냐 같이 둘 중 어느 것의 우월을 고민하는 건 작가의 의도와 아주 거리가 먼 해석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갑자기 방에 갇히게 되었는데 나가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남자는 당연한, 너무도 정상적인 인간형입니다. 작가가 문제적 인물로 삼고 있는 건 바로 여자입니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것이죠. 어쩌면 이 둘이 대등하게 다투고 있다는 것, 이게 바로 부조리일 것입니다.  

 

이제 각자의 감상

 관객의 사색은 이 지점부터입니다. 작가에게 외부의 힘이 195,60년대의 소련, 사회주의였다면 지금 현재 우리에게 외부의 힘은 어떤 게 있을까요? 그리고 여자가 갇혀있으면서도 자신은 "자유"다라고 어처구니 없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도 실제로는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나는 자유롭다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우리가 자유로운가 하는 물음은 현실적인 물음입니다. 내일 직장에 안나가도 되고, 보기 싫은 직장 상사를 보기 싫으니 안봐도 되나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실제 "자유롭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당신은 자유롭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얘기합니다. 그런가요? 정말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혹 연극의 여자처럼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자유롭지 않다면, 당신을 구속하는 흰 손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돈 같은 경제적 현실, 주변의 시선, 사회적 관습...... 특히 당신에게 나타나는 흰 손은 무엇인가요? 무엇이 나를 구속하고, 나를 수치스럽게 느끼게 만들까요? 

 사실 '수치'는 일상에서 너무도 자주 목격하는 모습입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상사에게, 고객에게 어쩔 수없이 복종하면서 수치를 느끼는 일은 너무도 흔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항이 답이겠지만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작품에서 제가 느낀 것 하나는 최소한 착각하지는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불편하지만 인식하자는 거죠. 그래야 그 다음 어떤 해결책이라도 나올거 아닙니까? 그런데 현재의 세상은 "자유롭지 않으면서 자유롭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부조리한 일이죠. 사실 부조리를 인식하는 건 불편한 일입니다. 그래서 부조리극을 보는 건 사실 불편해요. 부조리극은 이 불편함을 환기시킴니다. 그것을 통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명확히 인식시키고자 하는 거죠. 그래야 바람직한 내일이 가능하니까요. 

 

  여기까지입니다. 어쩌면 좀 어려운 연극이어서 빗나간 해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한번 되새겨보면 연극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작가의 의도 대로 작품을 해석했다고 해서 생각할 거리가 줄어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늘에 비추어보면 자유에 대한 작가의 문제 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