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들

정말 능력 때문에 성공하는 것일까?

sungwo 2024. 10. 2. 11:18

계급천장

샘 프리드먼 + 대니얼 로리슨 지음 / 사계절 출판사 / 2024년 2월 발간

 

고현정을 아시나요? 

  한국의 배우 고현정을 아시나요? 배우 고현정은 요즘 젊은 세대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20대 이상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배우입니다. 1990년대 중반 TV로 방영되었던 <모레시계>란 드라마로 일약 전국적 스타가 되었죠. 왜 배우 고현정 얘길 꺼내냐 하면,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가 떠올라서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모레시계>가 전국적 선풍을 타고 난 후 얼마 안되서였을겁니다. 그녀가 국내 최고의 재벌인 삼성가로 시집을 갔죠. 그 당시엔 막연히 삼성 집안 아들 중 한명이겠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딸 집안의 외동아들에게 시집을 간 거였습니다. 국내 최대 할인점인 이마트, 신세계백화점, 프로야구 구단 SSG 를 거느린 정용진이란 사람과 결혼한 겁니다. 화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로부터 한참 후 이혼 소식이 나옵니다. 약간 번잡했어요. 조용한 이혼은 아니었고, 삼성 측에서는 뭔가 감추려는 듯한 일들이 있었고, 고현정은 마치 가출하듯 그 집안에서 나온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때 이런저런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삼성 집안에서 왕따를 시켰다, 시누이나 동서들이 자기들끼리 프랑스어말로 얘기해서 고현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같은 얘기들이죠. 나중에 고현정 스스로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히긴 했지만 어쨌는 문화적으로 잘 어울리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떤 장벽 같은 가로막이 있었던거겠죠. 

 

능력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습니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천장, 장벽을 다룬 책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와 평등을 핵심 가치로 삼습니다. 그래서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하죠. 그렇습니다. 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변하면서 신분제는 사라지고 이제는 노동자, 농민의 자식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도 하는 사회로 세상은 변모했습니다. 이를 사회 이동성이 증가되었다고 얘기합니다. 누구나 의지와 능력만 있으면 최정상의 위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사실 현실에서는 과연 그런가 하는 의심이 만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더 고도와 되면서 오히려 불평등은 심화되고 그 차별은 점점 더 고착화 되어가고 있다는게 요즘의 진단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차별의 고착화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면 좀 평범하죠? 살면서 많이 느끼는 것이기도 하고, 대학 진학율 같은 각종 지표들이 빈부격차의 고착화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여러번 있었으니까요. 하위층에서 상류층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 정도는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길이 닫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좀 어렵긴 하지만 아직도 노동자 가정 출신의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그래서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다는 믿음은 아직도 견고합니다. 불리한 상황은 어쩔 수 없지만 방법은 없는 것은 아니니 자신의 능력으로 한번 승부를 내보자 하는 생각하는겁니다. 

 

오히려 더 증가하는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은 이렇듯 아직도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젊은 청년들에게 이것은 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내가 성공한 건 내 능력 때문이다, 그리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덜 보상 받은게 당연하다. 과정만 공정하면 된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공정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죠. 문제는 그 공정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악한 이들이 어떤 정부 정책에 의해 보호되거나 이들에 대해 가산점을 주는 것들에 대해 분노하기까지 합니다. 왜 저들에게 혜택을 주느냐? 이런 생각이 극심하게 드러난 게 문재인 정부 초반에 인청공항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할 때였습니다. 별도의 과정을 통해 입학한 농촌 학교 출신 학생들에 대한 차별도 같은 경우고요. 모두 공정에 대한 요구가 오히려 힘없는 이들에게 향한 경우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하면 사회는 공정할까요?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횡횡하고 있는 불공정에 대해선 모르거나, 외면하는 건 아닐까요? 이 책에서는 바로 이러한 불공정의 실체에 대해 좀 더 세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단지 부자집 아이들이 좋은 대학 간다, 정도만이 아니라 그 다음 단계에서는 더욱 극심한 불공정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각종 통계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여주고 있죠.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장벽은 그 다음에 있다는 겁니다. 가령 노동자 부모를 둔 아이가 성실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고 합시다. 그 아이는 어디까지 승진할 수 있을까요? 그 과정에서 그 아이의 능력은 어떻게 발휘되고 평가되고 있을까요? 이 책에서는 직장 취직 후 그 다음 단계에서 더한 장벽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가난한 집안 출신의 아이들은 대기업에 취직한다고 하더라도 이사까지 승진할 수는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벽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인맥, 위험한 도전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경제적 제약, 부자 출신들만이 공유하는 어떤 문화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마치 배우 고현정이 재벌가의 며느리는 될 수 있었지만 결국 못견디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 어떤 장벽이 있다는거죠. 가령 시누이가 갑자기 불어로 말하는 것처럼, 상품 회의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영미문학의 어떤 소설을 들먹인다던지, 클레식 공연을 빗대어 얘기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사회의 상층부들은 그들 나름만의 문화를 장벽처럼 구축해 놓고 다른 이들은 진입하지 못하게 한다는 얘깁니다. 책에서 인터뷰한 다수의 서민 출신 직장인들은 몇 번 상층부 사람들과 어울리고 나면 스스로 그곳은 자신이 있을 곳은 아니라는 판단을 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들만의 유머, 옷차림, 미적 기호 등이 있어 오히려 이들과 같이 있을 때 불편함을 느낀다는 겁니다. 

 

 특히 이런 장벽은 의사, 법조인, 언론인 등 기존의 상위 직업군에서 더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의사가 될 수는 있으나 병원장은 절대 안되고, 판사는 될 수 있으나 고위직으로는 갈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일반 대기업에서도 이사급 이상은 내부 승진보다 외부에서 스카웃 해서 오는 경우가 많고 내부 승진 과정에서도 어드 정도 인맥, 지연 등등에 의해 가난한 집안 출신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탈락되는데, 사실 그 과정에서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는 극히 작은 부분만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혹 능력을 평가한다고 하지만 이 정도 되서 평가하는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고요. 저자는 여기서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세습되는 것들이며 개인의 노력만으로 획득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강남, 외고, SKY 의 상사는 어떤 직원을 마음에 들어할까? 

 이같은 출신 배경을 갖고 있는 이사가 우선 눈에 늘어오는 직원은 어떤 사람일까요? 몇 명의 부장들 중에 누구를 다음 승진자로 추천할까요?  강북에 사는 농촌 출신의 자수성가한 부장을 뽑을까요? 아니면 바로 옆동네 아파트 사는, 외고와 명문대 출신의 부장을 뽑을까요?  통계는 자신과 유사한 사람을 뽑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취향입니까? 불공정입니까? 

 

부르디외 ( Bourdieu)

  이 책에서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부르디에가 많이 언급됩니다. 그의 사상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책이란 얘기입니다. 그 사람이 내세운 핵심 개념 몇 가지가 있는데, 바로 <아비투스> <장 이론> <문화자본> 이런 것들입니다. 이에 대해 사전에 개략적이라도 훝어 본 후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중 '아비투스'는 다른 인문서들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단어입니다. 특히 문화적 자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어렸을 때 미술관이나 음악회에 가는 경험을 쌓은 것, 고전을 읽는 것 이런 것들이 단지 교양 차원이 아니라 훗날 경쟁력 있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책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책은 영국 사회를 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많은 통계를 바탕으로 하고요, 기존의 통계를 추출하는 방식의 잘못도 잘 따져들고 있습니다. 영국 사회와 우리는 좀 다르겠죠. 그 동네는 아직도 예전의 귀족 전통이 상당하게 남아 있는 사회입니다. 좋아하는 스포츠도 다르죠. 그리고 인종 문제도 있고 우리와는 좀 여러가지가 다르긴 합니다. 그래도 기본적인 계급 차별은 마찬가지겠죠. 한국 사회는 한국 전쟁 등 격동기를 지나며 귀족 문화가 박살난 적이 있어 좀 다르겠지만 요즘 사회의 경향을 보면 다른 형태의 귀족 문화나 등장하고 있어 보입니다. 이른바 강남 귀족입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서 읽는다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어렵지 않습니다. 번역도 매끄럽고요, 복잡하게 철학적 주제를 갖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학으로 분류되는 내용의 책입니다. 재미도 있습니다. 연구자가 아니라면 통계 같은 건 대충 봐도 됩니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영국에서도 화제가 된 모양입니다. 기존의 이론들과는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니 당연해 보입니다. 저도 이 책 소개를 페북에서 봤습니다. 그래서 독서 목록에 올려 놓았다가 이제야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추천합니다. 시간이 아깝지 않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