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지하철이 다니기 시작한 지 50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고 해서 가 봤다. 이 전시회를 보기 위해 서울에 올라온 건 아니다. 집사람 수행원으로 동대문 왔다가 나 혼자 다녀왔다.
위 지도는 1942년에 총독부가 만든 서울, 당시 경성의 교통 계획도다. 그때 이미 경성에 지하철을 만들 계획을 수립했는데 지금 1호선 지하구간과 거의 동일하다. 이런 계획을 수립했다는 건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할 때 영구히 지배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을 알려준다.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단순히 자원 확보나 시장 확대를 위한 식민지 지배가 아니었다는 거다. 계획대로 지하철을 건설했다면 그 돈은 내지, 그러니까 일본 본토에 사는 일본인들의 세금으로 마련했을 것이다. 일제 시대 내내 총독부는 일본 본토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았고 그 돈으로 철도로 놓고 수력발전소도 건설하고 했다. 조선인을 위해 그랬다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그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했고 그래서 완전히 하나의 나라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한반도에 엄청나게 투자했고 반도인들도 살살 달래고 그랬다. 그냥 객관적이 사실이다. 이걸 가지고 '식민지 근대화론'이니 하면서 토착왜구로 모는 건 억지다.
지도를 보면 지금 강남구 쪽이 텅텅 비어있는 걸 볼 수 있다. 서울 - 부산을 잇는 중심축이 지금의 경부선 철도길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서울 - 영등포 - 시흥 - 안양 - 수원 이 축이다. 기존의 이 축을 뒤엎고 지금의 경부 고속도로 구간을 결정한 것은 박정희 정부 때다.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고속도로가 나면서 강남, 서초, 양재, 용인으로 이어지는 축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지금 강남을 예전엔 영동이라 했는데 그건 바로 영등포 동쪽이란 얘기다. 그만큼 영등포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서울 지하철 건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이다. 처음 논의가 시작될 때 정부 내에서도 강력한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가난한 나라에서 지하철 건설에 돈을 쏟아부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부총리도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 때 잘 결정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잘 판단하기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일들은 그 후에도 계속 있어왔다. 경부고속도로, 인천 공항, KTX 건설 등 지금은 잘 했다고 생각되는 많은 일들이 사실은 상당한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되었다. (인천공항은 환경, 기후 우려로 - 안개 낀다 등등 / KTX는 자기부상식으로 해야지 한물가기 시작한 고속철 놓는다라는 이유로 반대함)
1호선 준공일은 1974년 8월 15일이었다. 내 나이 사람들은 다른 이유로 이 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육영수 여사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암살된 날이다. 그 일로 박정희 대통령은 준공식 참석을 못했다. 그 때 대통령이 준공식 때 박기로 한 철제 핀이 보존되 전시되어 있다.
준공식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빨간색 지하철은 일본에서 만든 것이다. 우리가 만든 기차가 투입된 것은 1977년부터다. 처음 지하철을 만들었으니 어려움이 많았겠다는 건 짐작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겠다싶다. 7,80년대 한국 사회를 지칭하는 것 중 하나가 관료사회라는 건데, 주로 비판적으로 쓰인다. 하지만 그 당시 관료, 즉 공직에 있었던 사람들은 스스로 자부심이 아주 강한데 자기들이 지금의 대한민국 건설의 주역이라는거다. 모두 수긍하긴 그렇지만 그래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초기 지하철 기본 계획 수립 같은 문서들이 있는데, 아마 그 기본 계획 수립에 관여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지금 지하철 태동의 주역이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나도 농담으로 "지하철 3,4호선 다 내 손을 거친 것들이야." 하니 말이다.
위의 표식에서 보듯이 1호선 건설에서 일본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물론 공짜로 해 준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아시아에서 지하철 건설을 서울이 네번째인데 이 보다 앞선 도시는 동경, 북경, 평양이다. 평양 지하철 건설에 소련 및 당시 동구권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은 기술적 도움만 준 것은 아니다. 당시 재정 상황에서 지하철 건설에 쓸 막대한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채권도 발행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가장 큰게 바로 일본의 차관 지원이다. 사실이 그랬단 얘기다. (일본에 대해 조금만 좋게 얘기하면 친일파라로 하도 지랄거리는 것들이 많아서. ㅎㅎ)
전시의 상당 부분은 첫 개통된 지하철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풍경들로 채워져 있다. 사람들의 기억들, 기념물들 같은 것들이다. 그 때 담배값에도 개통을 기념하는 마크가 새겨졌는데 마크 자체보다 그 때 담배값들을 보는게 흥미로웠다. 새마을, 청자, 은하수, 거북선 등등
그외 지하철을 대하는 서울 시민들의 감격, 일화들도 소개되어 있다. 2차선 개통 때 일화 중에는 신발을 벗고 지하철에 올랐다는 얘기도 있고 이대역에 설치된 국내 최장 에스컬레이터에 대한 감탄도 있다. 지하철에 설치된 선풍기 때문에 더운 줄 몰랐다는 당시 시민의 기록을 보고 예전에는 지하철에 에어컨이 아니고 선풍기가 달려 있었다는 것도 떠올랐다. 재미있게 기록들을 봤다.
위 두 개의 사진은 87, 88년도 즈음의 사진들이다. 지하철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자는 홍보물이다. 지금 젊은 사람들이 알면 기겁할 일이겠지만 한동안 지하철에서 - 내 기억에는 객차 안에서는 아니고 승강장에서 - 담배를 피웠다. 내가 똑똑히 기억하는 건 대학 다닐 때 승장장에 있는 모래 재털이에서 장초를 뽑아 담배를 피웠던 일이다. 전철을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우다 전철이 오면 모래 재털이에 담배를 쑤셔 넣고 타게 되니까 온전한 장초들이 제법 많았는데, 청소하는 분이 오기전에 장초 여러 개를 주머니에 담아 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아래 사진은 줄 서기 캠패인을 하는 장면이다. 줄을 서서, 먼저 내리고 난 후 승차하자는 캠페인이다. 연예인들이 역에 나와서 홍보했는데 이때부터 내린 후 타고, 줄서서 기다리는 것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려준다. 이런 걸보면 우리가 저개발국 국민들을 보면서 '저런 미개인들--' 하면 절대 안된다는 걸 새삼 생각하게 된다. 우리도 얼마 전까지 그랬다.
규모 있는 전시는 아니다만 한번 시간내도 아깝지는 않을 전시다. 입장료는 당연 무료다. 그리고 바로 옆이 경희궁이다. 이제 날씨도 선선해졌으니 산책할 만도 하다. 시간 많은 이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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