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으로 남아 있을 때 삶을 떠나기로 선택한 남편
IN LOVE
사랑을 담아
이 책은 논픽션입니다. 지은이는 에이미 블룸이란 여성입니다. 미국 작가이며 심리치료사이기도 합니다. 작가의 남편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습니다. 남편은 알츠하이머병이 더 진척되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 전에 죽을 결심을 합니다. 아내인 작가도 이에 동의하고요.
그래서 스스로 선택한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방안을 찾습니다. 오랜 조사 끝에 “디그니타스”라는 기관을 알아내고 여기서 삶을 마감합니다. 디그니타스는 자살을 도와주는 기관입니다. 약물을 투여해서 당사자가 가급적 고통스럽지 않게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의학적으로 도와줍니다. “동행자살”또는 “조력자살”이란 용어를 쓰네요.
조건은 매우 까다롭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조건은 당사자가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신청서를 낸 후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글을 써 보내야 하고, 우울증이나 신경증적 요인이 없음을 의학적으로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해야 합니다. 비용도 작지 않습니다. 1만 달러의 비용이 듭니다. 그리고 디그니타스 사무실이 있는 스위스의 취리히까지 올 수 있을 정도로 거동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처음 신청서를 작성하고 나서 예비 승인 절차를 거쳐 약물을 투약할 때까지 디그니타스에서는 매우 여러 번 본인의 의사를 재확인합니다. 조금의 부담도 없이 스스로의 결정을 취소해도 된다고 최후의 순간 직전까지 묻고 또 묻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분별력” 온전한 판단력이 필요해요. 절차의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인지와 이해를 기반으로 선택을 분명히 내릴 수 없다면 절대로 누구도 받아 주지 않을 거예요.
저자의 남편은 이렇게 삶을 마감합니다. 이 책은 이 과정을 함께 한 아내의 기록입니다. 처음 알츠하이머병을 인지했을 때부터, 그리고 의학적 진단을 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기를 원하고 이를 선택하여 실행할 때까지 이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담아 놓았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크게 목이 메이거나 슬프지는 않습니다. 여러 번 “울었다”는 문장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마냥 비탄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부부의 사랑이 아주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추억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것들입니다. 작가는 부부가 겪은 소소한 일들을 담담하게 얘기하는데 오히려 그런 일들을 통해 ‘참,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이런 이별을 이런 방식으로도 잘 받아들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책을 읽는 중 내내 생각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알츠하이머 병에 걸렸다면 난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우리나라에서는 별 방법이 없습니다. 억지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치료를 거부할 권리 정도는 있지만, 아직 안락사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들 역시 대부분 마찬가지입니다. 안락사를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불치병이어야하고 몇 개월밖에 생존 시한이 남지 않아야 한다든지, 그리고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생존 기간마저 매우 고통스럽다는 것들이 의학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한다든지 하는 식입니다.
이유는 바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 때문입니다. 생명은 개인이 함부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여전히 공고합니다. 살아있는 것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스스로 죽을 수 있는 권리는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아직은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 법이 허락하지 않더라도 자살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고요.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마음이 좀 찹찹했습니다. 책 맨 뒤쪽을 보면 이 책에 대한 호평이 많긴 한데요, 그 중 하나를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슬픔은 가장 지극한 사랑으로 몰아낼 수 있다는 지극한 사실을 일깨워 주는 책” <타임> 선정 “2022년 최고의 논픽션 1위”에 오른 것을 비롯해 많은 기관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고도 하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얘기도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찜찜함을 오래 지우지 못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 고인도 참 대단한 사람이고, 그 아내인 작가도 이를 참 슬기롭게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제 머릿속에 남는 단어는 ‘편이성’이었습니다. 죽음을 선택하고 추모식까지 참 깔끔하게 진행되었다는 느낌. 그런데 그 저변에는 ‘편이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뭐, 비판하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굳이 삶을 구질구질하게 오래 살 필요가 있어?’ 하는 것도 제 생각이니까요. 깔끔함과 구질구질함 사이에 고민이라고 할까요?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제가 다뤄진 적이 있었습니다. 『본심』이라는 일본 작가의 소설이었고 거기에 대한 글도 쓴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자유사”라고 표현했는데요, 약간의 절차만 거치면 자살이 허용되는 사회에 대해서입니다. 거기서는 자살에 대한 자유가 허용될 때, 그 자유가 보이지 않는 강제로 변용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담겨 있었지요. ‘주변 사람들 생각해서 이제 좀 죽어주는 게 어때?’하는 거죠. 누가 치매에 걸렸는데 주변에서 “자유사”를 얘기하면서 이를 암묵적으로 권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참 간단치 않은 문제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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