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무엇을 축적해 왔는가
김진표 회고록
이 책은 김진표라는 한 정치인의 회고록입니다. 정치인으로서는 별로 인기가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5선 정도 했고, 나중에 국회의장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민주당 내에선 온건파에 속했고 그래서 민주당 내 열렬 지지층에게는 욕도 좀 많이 먹었죠. 그런데도 당내에서는 원내대표도 했고 행정부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여러 차례 맡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권 때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국무조정실장을, 노무현 정권 때는 경제부총리, 교육부총리를 맡은 이력이 있습니다. 부총리까지, 그것도 경제, 교육 두 개에 걸쳐 맡았던 것을 보면 무엇인가 특출한 능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이력을 보면 박정희 정권 때부터 관료 생활을 시작했고 김영삼 정부 때는 재무부 차관까지 했었네요. 공무원으로도 가장 승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립했던 정권에서 차관까지 한 사람을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불러 쓴 것을 보면 뭔가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회고록을 읽는 이유
저는 몇 년 전부터 정치인들의 회고록을 종종 읽어왔습니다. 주로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정치인들입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회고록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회고록을 읽는 것은 내 생각과는 다른 상대의 소리를 경청하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회고록이란 것은 결국은 자기중심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 점들만 잘 가려서 읽는다면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 오롯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대부분은 이에 부합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독서는 자기 생각을 강화하는데 쓰이기보다는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접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사고를 확대시키는데 쓰이는 것이 더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축적”(蓄積)이란 단어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자주 떠올렸던 단어입니다. 시골 논둑길을 걷다 보면 자주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수로가 보입니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 수로들이 각각의 논밭과 하천에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로 저 위쪽에는 저수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수로들은 아마 70년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겁니다. 이런 수로들이 있기에 이제는 웬만한 홍수에도 논둑이나 하천 둑이 무너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날씨와 관계없이 거의 모든 논에 모내기가 가능해졌고요. 지금의 높은 농업 생산성은 이렇게 과거에 만들어 놓은 시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국민의 세금으로 이렇게 저수지와 수로들을 만들어 놓았고 그 혜택을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아주 외딴 곳까지 전봇대가 세워져 있고요,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외딴 동네까지에도 아스팔트 포장은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저는 “축적”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박정희 시대부터 여러 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 놓은 그 축적의 혜택을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축적에 대한 생각은 얼마 전 중앙아시아에 있는 키르기즈스탄을 여행하면서 다시 한번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국민소득이 몇천 불밖에 안되는 중앙아시아의 최빈국입니다. 나라의 빈궁함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로 상태는 엉망이고 도로가의 보도는 아직도 맨땅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도로 옆 하수관은 뚜껑도 없이 노출되어 있고 차선도 수년 간 관리하지 않은 듯 희미했습니다. 모두 정부가 세금으로 관리해야 할 시설들이죠. 이같이 부실한 시설들은 그 나라를 여행하는 내내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한 시간이면 충분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그곳에서는 두세 배 걸려야 갈 수 있었고 공중 화장실은 없거나 더러웠으며 도심임에도 불구하고 저녁 산책 때는 발 아래를 조심해야만 했습니다. 한숨이 나왔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개선하는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인데, 이 나라는 언제 이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까마득해 보였던거죠.
우리도 그랬을 것입니다. 70년대 초 김포 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은 이보다 얼마나 나았을까요? 별반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나라가 꾸준한 축적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적의 결과물들은 제법 그럴듯합니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인천공항부터 시작해서 세계에서 싸고 편리하다는 대중교통 시설들, 어디를 가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깨끗한 공중화장실 등등 키르기즈스탄과 비교하자면 우리가 그간 축적해 놓은 것들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지난 수십 년간 축적의 시간에 대해서는 자긍심을 가져도 될 듯합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축적의 시간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지금 윤석렬 정권 때까지입니다. 각각의 대통령들이 이룬 주요 업적을 한계와 함께 얘기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권 끝 무렵 퇴임을 앞두고 청와대에서 대통령과의 대담을 TV에서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정권 말기이니 선거를 앞두고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들이 넘쳐나던 무렵이었죠. 그때 문재인 대통령이 이런 얘기를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이 정파적 입장에 서서 정부가 무엇을 못했다, 나라 말아먹었다 이런 식으로들 얘기하는데 실재는 이룬 것들이 더 많다. 사실 대한민국에 있었던 정권에서 대부분이 그랬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데로 어떤 정권이 나라를 말아먹었다면 현재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해 있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죠. 수긍할만했습니다. 반대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저 정권은 정말 경제를 망쳤고, 한 일은 하나도 없이 나라를 말아먹기만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이룬 것들도 많고 잘한 일들도 꽤 많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정권을 들 수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최하위 점수를 받고 있는 대통령이지만 그 정권 때 했던 북방 외교나 남북평화 정책은 한국의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용하면서 자긍심을 갖는 인천공항을 짓는 것도 그 정권 때 시작했고 KTX 역시 그때 시작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산,분당 신도시를 건설한 것도 노태우 정권 때 한 일입니다. 이래저래 욕을 많이 먹었지만 이룬 것들, 그러니까 축적해 놓은 것들이 제법 많았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관점입니다. 비판만 하지 말고 이룬 것들도 좀 보자는 얘기죠. 그렇게 저자는 각 정권에서 이룬 축적들을 살펴봅니다. 동시에 한계를 지적하는 것도 빼놓지 않고 있고요. 앞서 소개한 것처럼 저자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관료 생활을 시작해서 특히 경제부처의 요직을 거쳤고 특히 김대중 정권 때부터는 청와대에 근무했거나 장관직 등을 맡는 등 정부의 내부에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신문보도 같은 곳에는 접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이 책에는 담겨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이 책 출간 무렵 한창 언론에 올랐던 이태원 참사에 대한 윤석렬 대통령의 얘기입니다.
자신(윤석렬)은 이 사고가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이상민 장관을 물러나게 한다면 그것은 억울한 이야기라는 얘기를 이어갔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극우 유튜버의 방송에서 나오는 음모론적인 말이 대통령의 입에서 술술 나온다는 것이 믿기가 힘들었다. (264P)
이게 보도되면서 한창 나리가 났죠. “대통령이 보수 유튜브만 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이었다” 이렇게 말입니다. (웃음) 이처럼 주요 인사의 회고록은 종종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합니다. 전두환 회고록 출판 때도 그랬고요. 화제가 되지는 않더라도 회고록의 내용들은 술자리 화젯거리로 올리는데도 아주 좋습니다. “전두환이가 허화평 허삼수를 날린 이유는 사실 김재익 수석이 추진했던 금융실명제를 그놈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라네” (이 책 59P) 같은 얘기들을 마치 정권 내부 소식통에게 들은 것처럼 할 수 있다는 거죠. (웃음) 회고록을 읽는 재미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이제 저자의 얘기를 몇 개 올려볼까요? 올리기 전에 한마디 언급할 게 있습니다. 축적의 시간에 대해 평가를 한다면 평가를 하는 기준, 철학 같은 게 있을 수밖에 없겠죠. 그 기준, 철학은 바로 회고록 저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것을 높게 평가하고 어떤 것은 한계 또는 오류라고 평가하는 그 사람 나름의 기준이 있을 것인데, 독자들은 바로 그 기준을 보면서 그 사람의 사고방식 혹은 정치철학을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김진표란 정치인이 제법 괜찮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료들, 특히 경제부처 출신의 관료들, 게다가 미국에서 유학을 통해 경제학을 배운 사람들, 게다가 우리나라 고위층 경제 관료들 상당 부분이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반이었던 시카고학파 출신인터라 그들이 하는 말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불신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양적 성장만을 추구할 뿐 공동체성이나 복지에 대한 국가의 책임에 대해서는 간과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을 것이란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정치인 김진표는 좀 달랐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예를 하나 들어보죠.
반면 지금 생각해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박정희 정권의 아쉬운 실정은 바로 교육과 주택정책이다. 박정희는 이 둘을 거의 완전히 시장에 맡겼다. (중략) 애초에 입시와 경쟁 자체가 좋은 것인지 혹은 나쁜 것인지, 그 제도적 장치와 철학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근원적 성찰이 없었다.
주거정책은 가장 철학 없이 중구난방으로 운영해온 대표적인 정책 중 하나다. / 이는 박정희 정책이 분양 위주로 부동산 정책을 추진하여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업보다. / 싱가포르의 독재자 리콴유가 공공임대주택 중심으로 주택 정책을 펼친 것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그나마도 (공공임대주택은)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전체 2200만 가구의 8.6% 수준에 그친다. 일반적인 선진 국가의 임대주택 비율이 약 20% 안팎인 것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39p ∽ 43p)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교육과 주거 문제를 드는 것은 처음 접합니다. 음 ∽ 그런 점이 있었네요. 저자는 교육과 주거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로 꼽습니다. 지금 국민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 결혼을 미루거나 아이를 낳지 않은 이유가 바로 저 두 가지 문제 때문이란 것을 언급하면서 여기에 대해 아쉬워합니다.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자의 전공은 경제학이 아니라 공공정책학군요. 저는 경제관료 출신이라 경제학을 전공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빼놓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공감하는 게 경제 성장인데, 그것을 가능케 한 핵심적인 이유로 들고 있는 것도 신선하고요. 역시 ‘그런 점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박정희 시절 기적과도 같은 경제성장을 이룬 가장 핵심적인 비결은 무엇일까요? 카리스마? 열정?…… 책을 읽어보시죠. (웃음)
다음 문장도 기억에 남습니다.
총칼로 권력을 잡았어도, 국가는 총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계획과, 회의와, 보고와, 저 모든 경제현장에서 벌어지는 역동적인 의사소통을 통해서 운영되고 발전한다. 어디서든 모두가 자신이 경제발전의 중요한 일원이라는 믿음 아래서만 국가는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전두환 시절, 숨은 대통령이 하나 더
전두환 편에 나오는 사례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아마 이런 얘기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전두환이가 경제는 잘 했는데 그게 바로 경제문제는 확실하게 경제 전문가한테 맡겼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당시에 경제 대통령이라고 불렸던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경제 운영에 대한 전권을 맡기다시피 했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경제 관료 중 최고로 일을 잘한 사람을 뽑으면 김재익을 뽑는 사람이 가장 많을 정도로 경제 운영에 관한 한 탁월했던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쿠테타로 집권한 만큼 정통성에 큰 문제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전두환 밑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김재익 수석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을 텐데 거기에 대한 김재익 수석의 답변이 실려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신군부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김재익을 비판하거나 매도하기도 했다. 그는 ‘김일성 밑에서도 일할 놈’이란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김재익의 대답이 명언이다. 그는 “경제개방과 국제화는 독재를 어렵게 한다. 시장경제가 자리 잡으면 정치의 민주화는 자연히 따라온다. 내가 김일성을 설득해서 그 사람 생각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의 밑에서 일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이후 우리 역사를 되짚어 보면 그의 말이 아주 틀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62p)
그렇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동안 저 역시 부정한 정권에 복무했던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요, 이 얘기를 듣고 보니 좀 생각이 복잡해지네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회고록은 매우 주관적인 기록입니다. 회고록을 보면 저자들 대부분 “객관적이려고 노력했다.”라고 서두에서 언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한계는 있겠죠. 이 점은 늘 고려하고 읽어야 합니다. 주관적 기록이라 하더라도 회고록이란 저술이 주는 장점도 많이 있습니다. 역사를 좀 더 세밀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중 하나입니다. 역사라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회고록에는 한 사람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역사 기술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고 세밀합니다. 그가 직접 했던 일, 들었던 것, 그가 속한 집단에서 당시에 했던 생각들 등이 증언처럼 담겨 있죠. 마치 역사의 1차 사료를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미시적으로 역사를 보다 보면 그간 내가 어떤 시대나 대상에 대해 추상적으로 판단하고 정의해 왔던 것들이 조금씩 흔들리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리 간단치 않다고 느끼고 생각이 복잡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생각이 복잡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독서의 효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진표의 회고록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대한민국 관료들의 생각 같은 것도 좀 엿볼 수 있었고요. 정부 내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도 재미있었습니다. 또한 우리 의회에서 “중도파” “온건파”에 속하는 정치인의 속내를 살펴 보는 것도 의미 있었고요.
읽기도 매우 편합니다. 편집인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저자 스스로의 글쓰기 솜씨가 느껴집니다. 종종 밝히는 정치에 대한 철학도 귀에 담을만 합니다. 개인의 회고록이지만 한 권의 한국 현대사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유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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